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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5 Science to the Future

    인간 사회를 비추는 거울, 자연을 통해 인간을 보다, 최재천

    이번 ‘Science to the Future’ 시리즈의 인터뷰이는 엔씨의 사외 이사로 선임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최재천 석좌교수입니다. 하나의 환경 아래에서 모든 개체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며 함께 진화해갑니다. 이 공진화(coevolution)의 이치는 자연에도 인간 사회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며, 이는 곧 최재천 교수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 자세이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자연과 게임은 닿아 있지 않은 것 같지만, 그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자연을 통해 인간 사회와 인간이 만든 게임에도 유의미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대자연과 함께 수십 년에 걸쳐 길게 호흡하며 얻은 생물학적 직관이 인간 사회에 주는 가르침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는 어떤 것인지, 최재천 교수의 지극히 ‘인간적’인 비전을 살펴봅니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 엔씨소프트 사외 이사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생물들의 사회적 행동을 연구한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를 마치고 미시간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생물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로 재임 중이다. 다양한 생명과 그 서식지를 보전하고 연구하기 위해 2013년 생명다양성재단을 설립했고, 통섭아카데미 대표와 국회기후변화포럼 공동 대표를 역임했다. 2023년에는 엔씨소프트 사외 이사로 임명되어 활동 중이다.


    대자연의 눈으로 인간 사회의 가능성을 보다

    전공 연구 분야인 사회생물학은 어떤 학문인가? 40년간 학계에 몸담으며 걸어오신 길이 궁금하다.

    사회생물학은 집단을 구성하여 모여 사는 동물들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하이에나나 사자가 왜 모여서 사는지, 코끼리가 왜 줄지어 이동하는지 등을 연구한다. 한국에선 개미 박사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딱 하나만 붙잡은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참 많이 연구해왔다. 박사 학위 주제로는 민벌레를, 개미 연구로 유명한 하버드대학교 에드워드 윌슨 교수님 제자로 있으면서는 남미에서 아즈텍개미를 연구했다. 한국에 돌아온 후 한참 연구 대상을 찾고 있는데 연구실 창밖에서 매일같이 까치가 떠들어대더라. 그래서 어느 날 ‘그래 알았다. 너 한번 들여다봐줄게’ 하고 시작한 연구가 지금까지 25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또 돌고래 제돌이를 풀어주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서는 돌고래에 관해서도 10년째 연구하고 있다.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로 계시는 동시에 생명다양성재단 이사장이시다. 코로나 팬데믹 당시에는 코로나19 일상회복지원위원회 위원장으로 계셨고, 올해엔 엔씨 사외이사직도 맡으셨다. 사회생물학자로서 유의미한 자문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하시는 게 일면 이색적 행보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를 사회생물학이란 학문의 고유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봐도 될지.

    사회생물학은 이름 그대로 ‘사회학’과 ‘생물학’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진화적 관점으로 동물들의 생태를 지켜보는 일은 생물학의 영역이다. 관찰을 이어가던 어느 날 자연계에 인간 사회의 일면이 투영되더라. 생물학적 직관이 사회학적 직관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계를 관찰하며 얻은 경험적 지식과 통찰을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해석이나 대책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이 자연계와 인간 사회를 관통하는 연구 분야라는 사실은 이제 공인된 듯하다. 코로나19 일상회복지원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코로나19의 전파는 생물학적으로 굉장히 진화적인 현상이다. 호모사피엔스라는 종이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를 만나서 역학관계가 발생하고, 두 종이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며 공진화한다. 세상 어떤 일도 혼자 이뤄지지 않는다. 이 관점은 자연계나 인간 사회에나 예외 없이 적용된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 관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연구해오시면서 가장 뜻깊은 성과가 있었다면?

    동물행동학 백과사전 개정판의 총괄 편집장을 맡았던 일을 꼽고 싶다. 미리 말하자면 이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동물행동학은 서구에서 유력한 학문 분야지만 한국에는 심지어 동물행동학회조차 없다. 그런 배경을 생각해보면 개정판 작업의 총괄 편집장 자리를 한국 학자가 제안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당시 한국의 연구 환경이 열악한 덕분이었다. 충분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던 때에 나는 내 연구 대신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을 서포트하는 역할에 집중하고 있었다. 함께 공부한 동료들이 각자의 분야를 리딩하는 위치에 도달하는 동안 나는 연구자로서 내 영역의 입지가 좁아진다는 위기감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러한 행보가 백과사전 총괄 편집장에는 적합한 조건으로 거듭났다. 각자 자신만의 전문 분야가 확고했던 다른 동료들과 달리, 제자들과 함께 다양한 동물들을 연구했던 내가 여러 동물을 집대성하는 백과사전의 총괄자로 적임이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개미만 연구했다면 동물행동학 백과사전의 개미 섹션 하나 정도에 참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자들이 이렇게 다양하게 연구해준 덕에 그 거대한 프로젝트를 리딩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지금까지도 놀랍고 감사한 성과다.

    연구하면서 겪은 도전과 실패담이 궁금하다.

    애리조나 사막에서 여름을 보냈을 때의 일이다. 사막 가장자리 연못에서 발견한 먼지폭탄벌레를 연구하기 위해, 동료와 나 둘이서 1년간 여기저기에 연구비를 신청하며 부지런히 2,000달러를 모았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현장으로 떠났다. 3일 동안 밤낮 없이 번갈아 차를 운전하고 낡은 모텔에서 묵은 후 드디어 현장에 도착했는데, 어제까지도 연못이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알고 보니 그 타운에서 모기가 많이 나온다며 하루 만에 연못을 다 메워버린 것이었다. 하릴없이 한 30분을 멍하니 서 있다가 또 3일 밤낮을 운전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사회생물학을 비롯한 자연 연구는 사실 자연의 허락이 없으면 시작도 유지도 불가능하다.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는 불가항력을 맞닥뜨리는 일은 늘 발생하고, 그땐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그러면서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된 것 같다. 바로 자연의 섭리를 겸허하게 겪어내는 것이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회생물학을 연구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냥 한다.’ 나에게 기회란, 늘 기대를 안 한 일들에서 많이 찾아왔다. 목표를 가지고 계획하고 노력해서 성공해본 기억이 별로 없는데, ‘그냥’ 하다 보면 오히려 어느 날 갑자기 뭔가를 이룰 때가 있었다. 유튜브도 그랬다. 구독자 수가 1만 명이 되지 않은 채 1년이 지날 때도 별로 초조하거나 답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상 하나가 많은 사람의 반응을 얻으면서 10만 명이 되고, 이제는 50만 명이 됐다.

     

    그래서,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면 ‘그냥 한다.’ 시작한 일은 딱히 그만둘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결과물에 대한 기대보다는 그 과정을 그냥 즐기면서, 힘들면 힘든 대로 돈 구걸도 하고.(웃음)

    사람들의 일상으로 과학을 끌어오다

    대한민국 과학 대중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셨다. 과거에 비하면 대중이 좀 더 다양한 채널을 통해 과학을 가까이하게 됐는데, 대한민국 과학 대중화의 현 좌표는 어디쯤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과학은 아주 얄궂은 운명을 갖고 있다. 현재 인류가 누리는 모든 문명의 수준은 과학의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이 과학의 중요성에 대해 계속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과학의 대중화 또한 과학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늘 인식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제 한국의 과학 대중화는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한다. 과학책 시장의 판도가 직접적인 증거다. 정재승 교수나 하은이 박사처럼 재미있는 과학책을 쓰는 사람이 많아지고 독자층도 두꺼워지면서 ‘과학책은 손해는 보지 않는다’ 정도의 인식이 시장 내부에 생겼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출판사가 과학책을 열심히 내는 시대가 됐다. 이제 과학의 대중화라는 작업을 과학자와 출판사 모두가 하고 싶어 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하면 이득이 되는 시장이 갖춰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부분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평가받고 있다는 부분이 뿌듯하고 감사한 점이 있다.

    과학 대중화를 위한 활동으로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신가?

    서울로 돌아온 첫해에 한 잡지사로부터 글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은 것이 나에겐 첫 계기가 됐다. 당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래서 개미에 대해 보다 사실적으로 써보자는 의도로 1년간 연재하고 책으로 엮어 발간했는데, 국내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에 관해 책을 쓴 최초의 사례였다. 다행히 언론과 시장의 반응이 좋았고, 점차 다양한 과학 도서가 출간되는 계기로 이어졌다. 이후 기고를 요청하는 매체도 늘어났고, 강연이나 TV 쪽으로도 발언대가 확장됐다. 유튜브도 중요한 활동 중 하나다.

    다양성과 통섭의 시각으로 엔씨를 바라보다

    엔씨 사외 이사로서는 어떤 역할을 할 계획인가

    오래전에 ‘통섭’이라는 화두를 던진 적이 있다.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 모두는 서로 연결돼 있다. 따라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통섭적으로 전반적 부분들을 두루 파악하고 접근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나아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환경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면서 기업으로서는 ESG 문제가 심각한 당면 이슈가 됐다. 덕분에 자연과 환경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회사가 통섭적 시각에서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통찰을 나누는 역할을 맡게 된 것 같다.

    ‘다양성’이라는 키워드를 강조해오신 걸로 안다. 다양성 측면에서 게임회사 엔씨를 바라볼 때, 사외이사로서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조직은 미래가 밝지 않다. 그런데 인간 사회는 왠지 다양성을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 그에 비해 대자연은 무한히 다양하다. 나는 거기에 분명 어떤 뜻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늘 조직 내의 다양성을 강조해왔다.

    엔씨는 더 높은 차원의 다양성을 구현해낼 수 있는 조직이다. 콘텐츠를 생성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엔씨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양성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심어줄 수도 있다. 만약 게임을 즐기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의 다양성을 자연스럽게 구현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렇게 다소 엉뚱하거나 쓸데없어 보이는 새로운 시각을 화두로 던지는 것이 사외 이사로서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MMORPG를 사회생물학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좀 새로운 접근일 수 있지만 교수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옥스퍼드대학교 인류학과에 계시는 로빈 던바(Robin Dunbar) 교수님이 고안한 ‘던바의 수(Dunbar’s number)’라는 개념이 있다. ‘150이라는 숫자는 진정으로 사회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개인적 숫자’이며,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부족의 크기도 150명 정도였다는 개념이다. 150이라는 숫자는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굉장히 자주 나타난다. 종교 집단들이 커지다가 분열할 때의 규모나 고객 관리를 위한 연락처의 최대치 등이 그렇다. 그런데 놀랍게도 게임 안에 존재하는 동맹도 약 150명 선에서 분할(split)이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이것을 MMORPG가 인간의 삶을 상당 부분 구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여겼다. 사람이 만들어낸 가상공간의 삶에서도 어쩌면 실제 삶의 모습이 재현되는 것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사회생물학의 여러 현상과 이론이 게임 안에서도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다.

    오래전부터 교육, 특히 토론에 관한 책을 쓰고 싶었다. 교육 문제를 오래 고민한 끝에, 우리나라 교육의 결정적 약점은 토론 능력을 기를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서양의 교육은 전부 토론이다. 수학 수업도 토론으로 한다. 그러니 미국에서 교수 생활할 때 당연히 학생들과 토론 수업을 했다. 한국에 와서도 한 학기도 빠짐없이 줄기차게 토론 수업을 했는데, 한 번도 재미있는 토론 수업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교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시기가 되고 나니 토론에 대한 이야기를 써서 사회의 흐름을 한번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엄두가 나지 않아서 망설이던 차에 좋은 기회가 생겨 지금은 출간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가까워진 참이다. 이후 공부에 대한 책도 출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나는 현재 한국의 교육 현장에 토론에 대한 니즈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중고등학교에서 토론 수업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대한민국이 굉장히 달라질 것이다. 토론에 익숙한 친구들이 성장하여 사회로 진출하면 사회 전체의 합리성 레벨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서로 소통하는 나라’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 거창한 목표나 계획을 세우지 않는 편이라는 말이 무색하지만, 생애의 마지막 과정에서만큼은 좀 거창한 꿈을 꿔볼까 한다.